패션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사이클처럼 반복되는 사임과 영입,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들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모양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아트 슈퍼바이저(Art Supervisor)와 카피 슈퍼바이저(Copy Supervisor)의 상위 개념으로 제작에 대한 책임을 지고 관리하는 총체적인 지휘자를 말한다.)
지난 4월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생 로랑(Saint Laurent)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바뀌었다. 생 로랑의 수장으로 군림했던 에디 슬리먼(Hedi Slimane)이 사임을 발표한 데 이어 사흘 만에 후임자가 발표됐다. 새로운 후임자로 지목된 인물은 베르수스 베르사체(Versus Versace)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안소니 바카렐로(Anthony Vacarello)다. 이로써 지난해부터 소문으로만 떠돌던 에디 슬리먼의 퇴장과 안소니 바카렐로의 등장이 현실이 됐다.
지난 1년간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바뀐 것은 생 로랑이 네 번째다. 앞서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은 지난해 8월 약 3년 간 몸담았던 발렌시아가(Ballenciaga)와 이별을 택했고, 지난해 10월에는 라프 시몬스(Laf Simons)가 디올(Dior)을 나온 데 이어 알버 앨바즈(Alber Elbaz)도 랑방(Lanvin)을 떠났다.
알렉산더 왕은 2012년 서른이 채 안 된 어린 나이에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됐다. 이곳에서 15년간 머물렀던 니콜라 제스키에르(Nicolas Ghequiere)가 루이비통(Louis Vuitton)으로 떠나면서 생긴 공백을 그가 메우게 된 것이다. 알렉산더 왕은 약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발렌시아가의 역동적인 성장을 이끌어냈으며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개인 브랜드에 전념하고 싶다는 것을 이유로 사의를 표명했다. 당시 패션계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다소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의 바통을 이을 후임자로는 해체주의, 신비주의의 대명사가 된 베트멍(Vetments)의 수장 뎀나 즈바살리아(Demna Gvasalia)가 임명됐다.
알렉산더 왕과 발렌시아가의 이별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라프 시몬스마저 디올에게 헤어짐을 통보했다. 라프 시몬스는 지난해 10월 디올을 떠나면서 “개인 브랜드를 발전시키고자 할 뿐만 아니라 나의 커리어를 여기까지 오게 한 원동력이 된 열정, 그리고 내 인생의 다른 관심사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한 열망에 디올과 헤어짐을 결정하게 됐다”라며 “이곳에서 일하면서 디올의 아름다운 히스토리에 몇 페이지를 덧붙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대단한 영광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2016 S/S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약 3년 반 동안 머물렀던 디올을 홀연히 떠났다. 아직까지도 라프 시몬스는 그만의 스타일과 디올의 아카이브를 조화롭게 재해석해 디올을 제2의 전성기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라프 시몬스의 후임자로는 발망(Balmain)의 올리비에 루스탱(Olivier Rousteing), 지방시(Givenchy)의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i), 알투자라(Altuzarra)의 조세프 알투자라(Joseph Altuzarra)가 거론되고 있지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디올은 2011년 3월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를 해고한 뒤 꼬박 1년 만인 2012년에 라프 시몬스를 후임자로 발탁한 바 있다.
랑방의 알버 앨바즈는 세 사람보다는 재직 기간이 길었다. 2001년부터 2015년까지 약 14년간 랑방을 지휘하다가 지난해 10월 사퇴했다. 알버 앨바즈는 랑방을 떠나면서 패션계의 소모적인 형태에 회의감을 느낀다며 불편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가 떠난 후 에르뎀 모랄리오글루(Erdem Moralıoğlu)와 스테파노 필라니(Stefano Pilati)가 새로운 후임자 명단에 오르내렸지만 파리패션위크(PFW)에서 맹활약 중인 여성복 디자이너 부츠라 자라르(Bouchra Jarrar)가 선임됐다.
부츠라 자라르는 랑방 2017 S/S 컬렉션을 통해 화려한 신고식을 치를 예정이다. 그녀는 알버 앨바즈의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 상업적인 측면을 고려한 광범위한 미니멀리즘을 선보일 것으로 예측된다. 최근 랑방의 불안정한 매출을 고려했을 때 상업성을 추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답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명품)들은 스스로를 ‘패션 하우스(Fahion House)’ 또는 ‘메종(Masion)’이라 부른다. 각각 영어와 불어로 ‘집’을 뜻하는 이 말은 역사와 전통, 유산과 창작을 보유한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와 일반 브랜드를 구분 짓는 요소로 작용한다.
패션 하우스 또는 메종에서 만들어내는 의류와 가방, 구두, 액세서리 등은 모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손길을 거친다. 일부는 통일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기 위해 가구, 광고, 동영상, 쇼핑백 등 세세한 작업까지 도맡는다. 결국 패션 하우스와 메종은 그들의 헤리티지를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실현시키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능력으로 인해 존재하는 셈이다.
이들의 계약 기간은 약 3년이다. 보통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재계약을 통해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기도 하지만 앞선 사례들과 같이 이별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별을 택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어느 정도 명성을 쌓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이 다른 패션 하우스로 자리를 옮기거나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개인 브랜드에 전념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권한을 둘러싼 의견 차이가 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은 완벽한 통제를 원하지만 패션 하우스들은 디자인팀을 확대해 권한을 분산시키기를 강요한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불화가 생기는 경우다. 패션계는 “카리스마가 있으면서 현대적이고, 또 강력한 비전을 갖고 있으면서도 패션 하우스의 통제 범위 안에서 활동할만한 디자이너는 없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어찌 됐든 현재의 이슈들은 패션계에 꽤나 큰 변화의 바람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사이클처럼 반복되는 사임과 영입으로 신진 디자이너를 최고급 오트쿠튀르 디자이너로 키워내는 패션 하우스도 생겨났다. 바로 베르수스 베르사체다. 베르수스 베르사체는 로에베(Loewe)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조나단 앤더슨(Jonathan Anderson)과 크리스토퍼 케인(Christopher Kane)을 배출해냈다. 도나텔라 베르사체(Donatella Versace)는 “베르수스 베르사체가 신진 디자이너들이 패션 하우스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등용문이 됐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