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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꼬르소 꼬모 서울, ‘지오 폰티’ 전시 개최

10 꼬르소 꼬모 서울, ‘지오 폰티’ 전시 개최 | 1
<사진제공=삼성물산>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콘셉트 스토어 10 꼬르소 꼬모 서울(10 Corso Como Seoul)은 론칭 14주년을 기념해 오는 5월 1일까지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청담점 3층에서 이탈리아 건축가 겸 디자이너 ‘지오 폰티(Gio Ponti)’ 전시를 개최한다고 28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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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삼성물산>

이번 전시는 10 꼬르소 꼬모의 창립자 까를라 소짜니(Carla Sozzani) 재단 ‘폰다지오네 소짜니(Fondazione Sozzani)’, 지오 폰티 아카이브의 ‘살바토레 리치트라(Salvatore Licitra)’와 함께 공동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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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삼성물산>

지오 폰티(1891~1979)는 20세기 이탈리아 건축과 디자인의 중추적 인물이다. 고층 빌딩부터 커틀러리에 이르기까지, 지오 폰티 특유의 재치가 담긴 건축과 디자인은 이탈리아가 현대 디자인을 선도하는 국가로 자리잡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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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삼성물산>

10 꼬르소 꼬모 서울은 ‘지오 폰티’ 전시에서 지오 폰티의 다양한 업적 중에서 디자인 분야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그가 활동했던 50여 년의 시간을 담은 오브제와 이미지를 선보인다. 지오 폰티가 사물, 도면, 건축적인 요소의 조합과 비교를 통해 모든 작업에서 포괄했던 소재의 표현적인 잠재력과 디자인에 대한 접근 방식을 재조명한다.

이번 전시는 의자, 테이블, 서랍, 조명, 거울, 카펫 등 지오 폰티의 대표작 총 25점으로 구성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1.7kg 초경량 무게와 탄성이 특징인 의자 ‘슈퍼레제라(Superleggera, 1955)’를 비롯해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삼각형 모양의 다리가 돋보이는 ‘데짜 암체어(Dezza Armchair, 1965)’, 옆면의 부드럽게 꺾이며 이어지는 형태가 완벽한 비율을 보여주는 ‘디스텍스 암체어(Distex Armchair, 1953)’, 보는 방향에 따라 컬러가 다르게 보이는 격자 무늬의 상판을 가진 ‘스몰 테이블(Small Table, 1950s)’, 옆면의 조형미와 세세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체스트 드로워(Chest of Drawers, 1950s)’ 등이 있다. 지오 폰티의 작품들은 이탈리아 명품 가구 브랜드 카시나(Cassina), 몰테니앤씨(Molteni&C), 폴트로나 프라우(Poltrona Frau) 등과 협업해 제작됐다.

또 전시는 이탈리아 영화감독 프란체스카 몰테니(Francesca Molteni)가 지오 폰티 아카이브와 함께 제작한, 지오 폰티의 삶과 작품 세계를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영상 ‘지오 폰티 예찬(Loving Gio Ponti)’으로 마무리된다.

전보라 10 꼬르소 꼬모 팀장은 “다양한 문화를 소개하는 10 꼬르소 꼬모 서울이 론칭 14주년을 맞아 이탈리아 모던 디자인의 거장 ‘지오 폰티’ 전시를 준비했다”라며, “지오 폰티의 재치가 엿보이는 다양한 가구와 오브제들을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오 폰티(Gio Ponti)에 대하여

지오 폰티는 1891년 11월 18일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하였으나, 전쟁 기간 동안 팔라디오의 건축물을 살펴볼 수 있었다. 1921년, 밀라노 공과 대학을 졸업하여 같은 해에 줄리아 비메르카티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리사, 지오바나, 줄리오, 레티치아까지 총 4명의 자녀를 두었다.

1920년대
1923년, 지오 폰티는 리차드 지노리의 아트 디렉터로 선임되었으며, 이 곳에서 도자기 생산을 발전시켰다. 1927년, 그는 에밀리오 란치아, 토마소 부지, 파올로 베니니, 피에르토 키에사와 함께 아방 가르드 스타일의 오브제와 가구에 주력하는 건축가들의 공동체인 라비린토를 설립하였다. 1926년부터 1933년까지 그는 건축가 에밀리오 란치아의 파트너로 일하며, 브랜드 도무스 노바를 통해 리나센테 백화점의 가구 시리즈를 디자인했다. 1928년, 지오반니 마초키와 함께 평생에 걸친 건축, 인테리어 디자인, 장식 예술에서 중요한 아이디어를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서 도무스 잡지를 창간했다.

1930년대
폰티는 밀라노 트리에날레에 여러 차례 참가했다. 1933년에 열린 제 5회 밀라노 트리에날레에는 체사레 키오디와 함께 리토리아 타워를 디자인했고, 1932년에는 피에트로 키에사와 폰타나 아르테를 설립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그는 안토니오 포르나올리와 유지니오 손치니와 함께 로마 대학교의 수학관을 비롯, 파두아 대학의 문학부와 총장실, 밀라노의 팔라쪼 RAI, 사무용 건물인 팔라쪼 몬테카티니 등 공공 건물을 설립했다. 또한 밀라노의 꼬르소 베네치아에 위치한 저명한 주거용 건물인 라시니 하우스도 건축했다. 1936년부터 1961년까지, 폰티는 밀라노 공과 대학의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40년대
1941년부터 1947년까지, 그는 도무스를 떠나, 출판인인 알도 가르잔티와 스틸레 매거진을 창설한다. 이 시기 동안 장식 예술과 연극의 배경 도법에 대한 폰티의 관심은 깊어졌다. 그는 피에로 포르나세티와의 협업을 통해, 베니니의 유리, Jsa의 패브릭과 파올로 드 폴리의 에나멜을 칠한 가구를 만들었다. 그는 파두아 대학교의 총장을 위해 프레스코화를 그리기도 했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선박에 들어가는 가구를 디자인했다. 1948년, 그는 도무스로 돌아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딸 리사와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0년대
1952년, 지오 폰티는 폰티, 포르나올리, 로셀리 스튜디오를 설립하였고, 그 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 위치한 플랜차트 빌라, 아레아자 빌라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건축 의뢰를 수용하였다. 1954년, 폰티의 파트너이자 사위인 알베르토 로셀리가 지휘하던 스타일&인더스트리 매거진은 현대 이탈리아 디자인의 우수성을 깨닫고 황금 컴파스 상을 수여하는 디자인 경연 대회를 시작하였다. 1956년, 밀라노 최초의 고층 빌딩인 피렐리 타워는 아르투로 다누소와 피에르 루이지 네르비의 구조 컨설팅을 통해 실현한 폰티의 프로젝트였다. 1950년대 동안, 폰티는 건물의 표면에 세라믹 코팅을 하여 동적인 요소를 더하는 작업을 발전시키게 된다. 1957년, 폰티가 디자인한 수 많은 가구와 소품 중에서도 카시나를 위해 만든 슈퍼레제라는 널리 유명세를 떨쳤다. 같은 해, 아마테 라치테투라의 출판으로 그의 아이디어를 위한 다이어리가 세상에 소개되었다.

1960년대
1963년, 폰티는 테헤란의 네마지 빌라, 2개의 밀라노의 종교 건물인 샌프란세스코 알 포노니노 교회를 비롯하여, 1966년 완성한 산 카를로 병원의 산 카를로 보로메오 교회로 영향력을 넓혀갔다. 그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공공 건물과 호텔 건축에 대한 제안을 받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디자인 호텔 중 하나인 소렌토의 호텔 파르코 데이 프린시피(1960~1961), 이탈리아의 젊은 건축가인 난다 비고와 협업한 개인 주택인 말로의 카사 소토 우나 폴리아(1969)도 완성되었다.

1970년대
폰티가 80세가 되던 1970년, 그는 타란토의 그란 마드레 성당을 디자인하였고 이듬해 덴버 아트 뮤지엄을 디자인했다. 그는 실용적이고 움직여지는 형태에 대한 아이디어를 탐구하며 계속해서 가구를 다루었고, 이로 인해 압타 가구 시리즈, 시트가 작은 의자라고 알려진 가브리엘라 의자가 탄생했다. 그는 1979년 밀라노의 비아 데짜에 소재한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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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채원

슈즈, 백, 주얼리 등 액세서리를 담당합니다. 희귀한 액세서리와 공예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designers@fashion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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