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 한국드라마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지난 4월 방콕에서 만난 아시아여성들은 “별에서 온 그대 봤어요? 도민준씨 정말 멋있어요”라고 말하며 눈을 반짝 반짝거렸다. 태국, 베트남, 미얀마, 중국 이렇게 국적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들은 이구동성으로 도민준을 외쳤다. 나도 도민준과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녀들과 빨리 친해 질 수 있었다. 별로 돌아가지 않고 지구에 남아준 도민준에게 밥한끼 사야겠다.
그 중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동남아를 장기간 여행 중인 중국인 수수는 한국드라마에 완전 빠져서 핸드폰의 배경화면도 도민준으로 해놨다. 하루는 수수와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는데 약속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오지를 않는 거다. 초침은 계속 흘러가고 배에서 소리는 나고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왜 안 오는 거야.’ 혼잣말을 중얼중얼 거리며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수수가 얼굴을 드러냈다.
“야 물물(이름이 水水여서 가끔 이렇게도 부른다). 시간이 몇 시인데 지금 오냐?”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툭 쏘아붙였다.
“어. 나 배고파서 뭐 좀 먹느라고 늦었어.”
“뭐라고? 저녁약속 해놓고 뭘 먹었다고? 그게 말이 되냐?”
“아니. 그럴 수도 있지. 또 먹으면 되잖아.” 내가 정색을 하니까 수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또 먹는다고?”
“그래 또 먹을 거야.” 그러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국어로 “나쁜 난자”라고 그러는 거다. 평소에는 영어로 얘기를 하던 수수가 갑자기 한국어를 쓰니 짜증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웃음이 나왔다. 그것도 ‘나쁜 난자’라고 정확하게 말해서 더 웃겼다.
“뭐. 뭐라고?” 웃으며 수수에게 다시 물었다.
수수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우리말로 “아저씨, 나쁜 난자”를 반복했다.
“야. 나 아저씨 아니야. 그리고 나쁜 난자가 아니라 나쁜 남자거든. 난자는 여자의 그거야”라고 말했더니 심각했던 수수도 배꼽을 잡으며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물물, 그 단어 어디서 배웠어?”
“한국드라마 보면 이런 상황에서 나쁜 남자라고 그러던데.”
“너 이런 것만 배웠지? 그래 알았다. 배고프니까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밥 먹으면서 너 한국어 발음도 좀 잡아줄게.”
이렇게 한국드라마는 우리 문화뿐만 아니라 언어도 세계에 전파하는 일등공신이었다.
# 프랑스에 부는 한국드라마 바람
프랑스에서도 아시아만큼 한국드라마 열풍이 거세다. 중국, 일본, 동남아는 우리랑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어서라고 이해하면 되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프랑스는 왜 그럴까. 때마침 에펠탑 옆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프랑스인에게 한국드라마란>주제로 특강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는 당연히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 인 줄 알았는데 강연자와 강연대상 모두 프랑스인이었다. 그러니 통역이 있을 리 만무했다. 집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건져가야지. 프랑스인들 사이로 과감히 뛰어들었다. 그리고 사방을 살펴보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이 구석에 홀로 앉아 있었다.
옆자리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내 프랑스어가 아직은 강의를 이해할 만큼의 수준이 아니거든. 미안하지만 강의내용 좀 요약해 줄 수 있겠니? 내가 읽는 건 가능해”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녀가 웃으며 “그럼. 내가 해 줄게. 문제 없어”라고 말하더니 태블릿 PC를 꺼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역시 들이대길 잘했다.
일주일 후 그녀에게 강의 요약본을 받았다. 보너스로 4주간 4회에 걸쳐 오페라 근처에 있는 까페에서 만나 한국드라마에 관한 그녀의 생각까지 들을 수 있었다. 대학원생인 마뜨는 한국드라마 보는 게 인생의 낙일 정도로 한국드라마에 푹 빠져있었다.
■ 탄탄함 VS 지루함
“C’est null”(형편없어).
“프랑스드라마 어때?”라고 물었을 때 돌아온 프랑스인들의 한결 같은 대답이다. 자국문화에 관해서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한다는 콧대 높은 프랑스인조차도 프랑스드라마에 낙제점을 줬다. 그만큼 재미가 없다는 거다.
“마뜨야, 내가 만난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프랑스드라마 형편없다고 생각하던데. 너도 같은 생각이야?”
“응. 정말 재미 없어.”
“그 정도야?”
“일단 스토리가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 보면 볼수록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 그리고 시리즈가 너무 길고 지루해. 정말 못 보겠어.”
“그럼 한국드라마는 어때?”
“(갑자기 표정이 확 밝아지며) 한국드라마는 무엇보다 스토리가 탄탄하지. 내가 최근에 본 드라마가 <너의 목소리가 들려>, <신사의 품격>, <씨티헌터>, <해품달>, <주군의 태양>, <뿌리 깊은 나무> 인데 장르도 다양하고 어쩜 그렇게 재미나게 만드는지. 한국드라마 때문에 내 주말이 없을 정도야.”
마뜨는 신나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또 드라마OST 있잖아. 정말 적절한 타이밍에 나오더라고. 예를 들면 <신사의 품격>에서 김민종이랑 메아리가 만나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나오는 노래가 주니엘의 ‘illa illa’라는 곡인데 이거 왜 이렇게 좋니. 한국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는 정말 애절해”
“마뜨야, 너가 나보다 훨씬 낫다. 어떻게 OST까지 꽤 차고 있어?”
“간단하지. 재미있잖아.”
“너 프랑스 문화에 자부심은 있니? 프랑스인들은 자국문화에 관해서라면 세계 1등이라고 그러던데.”
“그럼. 음식, 예술, 영화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지. 그런데 드라마는 꽝이야. 프랑스드라마가 재미있었으면 당연히 봤겠지.”
소비자는 냉정하다. 재미없으면 애국마케팅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프랑스드라마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드라마는 스토리가 탄탄하지도 않을뿐더러 주로 과학수사, 법정물,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다. 퇴근 후 지친 몸을 끌고 와서 TV를 켰는데 또 무거운 내용이 나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짜임새 있는 이야기와 볼거리로 무장한 한국 및 미국드라마가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사실 재미라는 요소 앞에는 국가, 민족, 언어 이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를 호령한 것도 뮤직비디오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국가간의 장벽이 허물어졌다. 현시대에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요소라면 전 세계가 언제든 손을 내밀어 줄 것이다.
■ 영보이 VS 올드보이
프랑스에서는 올드보이들이 대세다. 크게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없기 때문에 TV보다는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 들 대부분이 40대가 넘은 중견 배우 라는 는 거다. 상대적으로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프랑스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대중은 새로운 스타를 보고 싶어한다. 특히 젊은 여성은 더욱더 이런 유행에 민감하다. 연예계에서 ‘신성’ 발굴에 혼신을 기울이는 이유도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이 시점에서 한국드라마가 프랑스의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틈새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드라마의 남자주인공은 매력적이다. 젊고 잘생기고 몸매까지 완벽하다. <프랑스인에게 한국드라마란>의 강연자였던 프리랜서기자 올리비에 레만이 남.녀 39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95%의 시청자가 여성이었다. 이 중 ■ 60%가 14세~24세 ■ 21.6%가 25세~35세를 차지할 정도로 젊은 여성들이 주 시청자 층으로 나타났다. 꽃미남들이 등장해 여성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과 초콜릿처럼 달콤한 사랑얘기들이 가득한 한국드라마에 프랑스여성들이 대리 만족을 하고 있다.
문화가 달라도 10대에서 20대 여성이 가진 감수성은 전 세계 공통 일 것이다. 놀라운 건 파리에서도 도민준의 인기는 여전했다. 아시아만큼 열광적 이진 않았지만 한국문화에 관심이 있는 여성들은 모두 도민준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아 김수현은 좋겠다. 동서양의 사랑을 이렇게 한 몸에 받고 있으니.
■ 한국문화의 힘
우리 문화가 프랑스에서도 빛을 보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교사상을 강조해 온 우리나라는 어른을 공경하고 윗사람에게 깍듯이 예의를 지킨다. 올리비에 레만 기자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은 드라마에서 비춰진 우리의 문화에 후한 점수를 줬다. 마뜨도 역시 한국의 예절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내가 온 콩고에서는 한국처럼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가 있거든. 그런데 프랑스만 해도 그런 게 거의 없는 편이야. 예를 들면 물건을 건네 줄 때 두 손으로 준다거나 존댓말 쓰는 거. 난 그게 좋은데.”
그렇다. 파리에서 매일 지하철을 타고 다니지만 젊은이들의 엉덩이는 천근만근이다. 임산부가 타도 어르신이 타도 멀뚱멀뚱 쳐다보며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그래서일까. 노약자들도 자리가 없으면 서있는걸 당연히 여기는 눈치다.
또한 한국드라마는 미국드라마에 비해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다. 그래서 다양한 민족이 사는 프랑스에서 폭넓은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국제 여론조사 연구기관인 ‘퓨 리서치 센터의 201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에는 약 4백 7십만 명의 이슬람교도가 살고 있다. 음주를 절대 금하고 여성의 순결을 강조하는 무슬림사회에서 섹스, 마약, 음주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미국드라마는 그들의 품으로 들어 올 수 없다. 이 부분은 꼭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무슬림사회에 모두 적용되기에 한국드라마가 글로벌파워를 발휘 할 수 있다.
# 그녀들의 이야기
방콕에서 만난 태국인 조조는 돈을 모으는 족족 우리나라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것도 벌써 5번이나 된다. “또 언제 갈 거야”라고 물었더니 “이제 돈 없어서 못 가요”라고 했다. 그리고 5초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몰라요. 이러다가 순간 지를 수도 있어요. 항상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뭔가에 이끌려 계속 한국 행 비행기표를 샀어요”라고 한국어로 말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작년에 서울에서 처음 만나 파리에서까지 그 인연이 계속된 프랑스인 로라는 대학생인데 올 여름 또 한국에 간다고 한다. 그러더니 “아시아나항공 비행기표를 싸게 구입했어. 저번에는 대한항공 탔는데 아시아나는 어때? 이번에는 제주도도 갈 거야”라고 연신 자랑이다. 한국 갈 돈을 모아야 한다며 아르바이트도 벌써 시작했다.
그녀들 대부분이 학생이라 돈도 별로 없다. 집에 돈이 많은 부자도 아니다. 그런데도 과감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싫었다. 그것도 여러 번씩이나. 이런 얘기를 들을 때면 한국인으로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한편 그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도 내 어깨를 짓누른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본다. 개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더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을까? ‘외국에 나오면 모두 외교관이 된다’라고 하던데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도민준 같이 또 별에서 와도 좋다. 다음에는 달에서 와도 좋다. 어디에서 오든 무슨 상관이랴. 모두 환영이다. <별에서 온 그대>처럼 좋은 드라마만 많이 만들어내면 그걸로 족하다.
간절히 바란다. 한류 문화 콘텐츠가 더 번성해져 전 세계에 울려 퍼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