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시즌 뉴욕, 런던, 밀라노 그리고 파리에서는 세계적인 패션쇼가 진행된다. 이를 통틀어 세계 4대 패션위크라 부른다. 세계 4대 패션위크에는 해외 프레스, 바이어, 유명 인사 등 초대받은 자들만이 입장할 수 있다.
세계적인 패션쇼를 직접 현장에서 미리 보는 것만으로도 선구자라는 인식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 소비자들은 패션쇼에 오른 의상을 약 6개월이 지난 후에야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SNS(사회 관계망 서비스)가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패션계가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영국 럭셔리 브랜드 버버리(BURBERRY)는 지난 5일 2016 F/W 패션위크 불참을 선언하며 혁명적인 선언을 했다. 내용은 이렇다.
“버버리는 올해 9월부터 향후 패션쇼 일정 및 매장 판매 방식을 기존 패션계 방식과 다르게 운영할 예정이다. 그동안 매년 네 차례(1, 2, 6, 9월) 선보였던 남성복과 여성복의 패션쇼를 통합해 연 2회(2, 9월) 열 것이다. 패션쇼 명칭은 기존의 봄∙여름 컬렉션과 가을∙겨울 컬렉션이 아닌 버버리 컬렉션으로 칭한다. 패션쇼에 나온 옷들은 즉시 매장과 온라인 스토어를 통해 판매할 것이다. 버버리는 시즌의 경계를 없애고 보다 즉각적이며 개인화된 방식으로 고객을 만나겠다”
이는 버버리가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명품)의 오랜 전통을 무너뜨리고 ‘그들만의 축제’에서 탈퇴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즉 9월에 선보인 옷은 9월 패션쇼가 끝난 후 곧바로 팔겠다는 것이다.
세계 4대 패션위크는 매년 2, 3월에는 그 해 가을과 겨울의 옷을, 8, 9월에는 이듬해 봄과 여름의 옷을 선보인다. 다음 시즌이 발표되기 전까지 바이어는 옷을 구매하고 각종 미디어는 관련 기사를 준비한다. 여기서 문제점은 정작 옷을 입을 실질적인 주인공인 소비자들이 꾸준히 외면받아 왔다는 것이다. 사실 몇 해 전부터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그들만의 축제’가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열풍인 글로벌 SPA 브랜드로 인해 시즌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욕구가 커졌기 때문이다. 버버리는 패션쇼와 현실의 사이에서 불편한 괴리감을 없애기 위해 이와 같은 선언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버버리의 크리에이티브 총괄 책임자 겸 CEO인 크리스토퍼 베일리(Christopher Bailey)는 디지털 혁신을 주도하며 특별한 포지셔닝을 추구해왔다. 그는 지난 2009년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최초로 온라인을 통해 패션쇼를 생중계했다. 이후 페이스북, 카카오톡, 라인, 구글, 애플 등과 다양한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버버리의 혁명적인 선언 이후 톰 포드(Tom Ford), 베트멍(vetements), 타쿤(Thakoon) 등 다른 브랜드들도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나섰다. 톰 포드는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변하는 세상에서 전통적인 방식의 패션쇼와 시스템은 예전처럼 통하지 않는다. 고객들이 입고 싶을 때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패션계의 진짜 임무다”라고 발표했다.
지난 1943년에 시작된 뉴욕패션위크(NFW)도 새로운 변화를 예고했다.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50~135불짜리 입장 티켓을 구입한 1만 8,000명의 일반 소비자들에게 패션쇼를 공개한 것이다. 패션쇼는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등 각종 SNS 채널을 통해 실시간으로 퍼졌다.
이와 관련해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Diane von Furstenberg) 뉴욕패션위크 협회장은 뉴욕타임스와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은 완전한 혼돈의 순간이다. 모두들 새로운 규칙을 배워야 한다” – 뉴욕타임스 「스마트폰은 어떻게 패션쇼를 죽이고 있나」
“전통적인 패션 업계의 일정 때문에 가장 혜택을 보는 곳은 자라, H&M, 포에버 21과 같은 글로벌 SPA 브랜드다. 패션쇼에서 선보인 의상이 매장에 나오기도 전에 복제돼 저렴한 가격에 팔려나간다. 지금처럼 4~6개월 전에 미리 진행하는 패션쇼 방식은 SNS를 통해 바로 구매하기를 원하는 소비자들에게 혼란과 좌절을 주고 있다.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을 위한 그들만의 패션쇼가 아닌 소비자들을 위한 축제가 돼야 한다”
현재 패션계는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다. 홍콩에서의 반중국 시위, 파리 테러 등의 여파로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최근에는 자라(ZARA), H&M, 포에버 21 등 글로벌 SPA 브랜드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며 패션계를 집어 삼켰다. 게다가 스마트폰과 SNS의 발달로 인해 수십 년간 지속됐던 패션의 생산, 유통, 소비 방식이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과거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의 자존심은 자신들의 옷에 대한 소비자들의 충성스러운 기다림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소비자들은 원할 때 원하는 것을 곧바로 얻어야 만족한다. 이것이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들이 현실을 직시하고 오만함을 내려놓은 이유다. 앞으로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들이 과거처럼 계속 콧대 높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 또 소비자가 그 오만함을 예전처럼 받아줄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