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구찌(Gucci)의 멀티 레이어(Multi-layered) 프로젝트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No Space, Just a Place. Eterotopia)’가 오는 7월 12일까지 서울 대림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서울의 다채로운 문화 경관과 현대 미술을 지원하기 위해 시작된 구찌의 문화지원 프로젝트로, 서울의 독립 및 대안 예술 공간의 복합적인 역사와 헤테로토피아(Eterotopia)에 대한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의 고찰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됐다. 전시는 ‘다른 공간(other space)’에 대해 개인이 타인 혹은 주변 환경과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법으로 지금과는 다른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장소라는 새로운 정의를 제시한다.
모든 프로젝트는 새로운 힘을 실어주는 내러티브를 확립하고, 다름을 이해하면서 소수자의 정체성과 퀴어 문화를 탐색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인 장소로서 대안 공간이라는 테마와 연결될 예정이다. 특히 불확실성이 가득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환경 속에서 대안적인 존재와 소비의 방식에 대한 성찰이 더욱 요구된다.
진보적 심미관으로 알려진 미리암 벤 살라(Myriam Ben Salah)가 큐레이팅한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는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사회에 대한 사유를 기반으로 한다. 특히, 전시의 핵심 주제인 장르와 젠더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가치, 학습경관(learnscape)의 개념, 자기표현의 긴급성, 영원한 인류학적 매니페스토 등은 대안 예술 공간의 역할과 목표를 대변한다.
역사적으로 독립 및 대안 예술 공간은 상점 앞, 건물의 위층, 창고 등 주류에서 벗어난 장소에 위치해왔다. 이런 공간은 정치적이거나 실험적이며, 상업적인 목표보다는 예술적 담화에 초점을 맞추는 등 ‘화이트 큐브’의 중립성과 대립한다. 1990년대 말 서울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발현된 이래로 예술 생태계에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하는 프로젝트가 증가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목표는 이러한 진보적인 장소의 가시성을 확보하고, 자율성에 대해 성찰하며, 미래를 위한 새로운 내러티브를 전망하는 개념적 도구로서 공간의 ‘대체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대림미술관의 4개층에 걸쳐 열리는 이번 전시를 위해 독립예술공간이 선정되었다. 시청각(Audio Visual Pavilion), 합정지구(Hapjungjigu), 통의동 보안여관(Boan1942), d/p, 오브(OF), 탈영역우정국(Post Territory Ujeongguk), 공간:일리(space illi), 스페이스 원(Space One), 취미가(Tastehouse), 화이트노이즈(White Noise)는 각각 자신의 팀이 고안한 프로젝트를 큐레이터와 함께 선보이게 되는데, 여기에는 참가하는 공간이 대표하거나 지지하는 한 명 혹은 여러 아티스트들의 작품도 포함된다.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선보이는 류성실 작가의 작품은 특히 의미가 있다. 인공 낙원의 개념을 살펴보는 <대왕트래블 칭첸투어> 와 <내려오는 광선>은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세속적인 미신과 허구적인 이야기에 주목한다. 합정지구에서는 입체 캔버스를 통해 이상적인 땅 그리고 실현 불가능이라는 양면적인 뜻을 지닌 ‘이상향’이라는 개념을 풀이한 전혜림 화가의 작품을 선보인다. 탈영역우정국에서는 강우혁 작가의 <달나라 부동산>(문유진 기획)을 선택했다. 이 작품을 통해 강우혁 작가는 공간이 협소한 서울시와 근방 지역에서 필요한 땅을 소유하는 개념을 달에서 다룬다. 우주 속 상상의 나라를 통해 강우혁 작가는 현실과 가상, 가능과 불가능, 우리의 소유물과 우리가 소유를 꿈꾸는 것 사이의 이중성을 해석한다.
시청각은 과거 전시들을 반영하여 시공간을 넘나드는 움직임과 변천을 살펴보는 <AVP ROUTE> 전시를 선보인다. 이 중 박선호 작가의 작품은 지도를 통해 인공물, 공간, 사라졌던 공간, 지리정보에 대해 다룬다. d/p는 ‘다른 공간’이 될 수 없는 우리의 몸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장소에 집중한다. 안무가 이윤정의 퍼포먼스 <설근체조>를 통해 감각과 연결성을 위한 환경이자 장소로서의 몸의 움직임, 특히 혀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오브는 전시 공간이 아닌 다양한 도심 생존 방식의 축소판이라고 스스로 정의하는 비교적 신생 공간이다. 오브는 세 개의 방을 바탕으로 전시를 기획하며, 각각 다른 프라이버시 수준과 집중도를 구현하는 방을 통해 가정의 개념과, 안과 바깥의 분리를 성찰한다.
공간:일리의 <크프우프크(QFWFQ) 유영하기>는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에 대해 고찰하기 위한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이다. ‘자연스러움’의 개념 자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현대 사회의 숨겨진 균열이 보이도록 관람객의 관점을 전환한다. 스페이스 원의 <I love we love we love I>는 시뮬라크라(simulacra)를 통해 감정의 환영을 불러 일으킨다. 전시, 공연, 토론 등으로 구성된 스페이스원의 미니 전시회는 낭만주의와 비판주의의 경계를 넘나든다. 취미가의 프로젝트 <취미관 대림점 – Not for Sale>은 예술의 가치가 지닌 의미와 상업적 공간 속에서 예술이 지니는 가치에 대해 살펴본다. 취미가는 미술관 안에 ‘비매품 상점’이라는 상업적으로 보이는 대안 공간을 형성하여, 사물의 진가를 재조명하고 소비자로서의 관람객에 대해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화이트노이즈는 <장수의 비결>을 통해 끝없이 맺는 한시적인 관계와 협업을 통해 예술가의 정체성을 재발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다. 예를 들어 단스타참브레(Dans ta chambre)와 문주혜는 화면 안과 밖의 상호작용에 대한 설치 작업을 통해 현실과 가상의 공간에서 협업한다.
또한, 본 전시의 큐레이터는 이야기와 토론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국내외 아티스트들에게 가까운 미래 혹은 환상적인 신화에서 영감을 얻은 몰입형 설치 미술품의 형태로 작품을 전시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메리엠 베나니(Meriem Bennani), 올리비아 에르랭어(Olivia Erlanger), 세실 B. 에반스(Cécile B. Evans), 이강승(Kang Seung Lee), 그리고 마틴 심스(Martine Syms)는 구찌만의 절충적인 컨템포러리 비전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유머와 마술적 사실주의가 스민 풍부한 시각적 이미지를 표현해 규범적·지배적 담론의 협소한 시각에 재치 있게 의문을 던진다. 이와 더불어 이동, 생명공학, 퀴어링, 혼종화의 주제를 환기시키며 ‘타자성(Otherness)’의 해방적 이야기를 위한 스토리텔링과 픽션의 잠재력을 탐색한다.
메리엠 베나니의 <CAPS에서의 파티>(2018-2019)는 비디오 설치를 통해 대서양 가운데 있는 섬인 CAPS의 주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CAPS는 ‘불법적으로’ 바다와 국경을 통과한 난민과 이민자들이 억류되는 곳이다. 미래에 이민자들이 겪게 될 (신체적이며 심리적인) 실향을 상상하여 지리적 양 끝단, 시민권의 자격, 연령, 성별 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현한다.
세실 B. 에반스의 <마음이 원하는 것>은 현대 인류의 상태를 정의하는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을 탐색한다. 미래가 현실이 되어 버린 어지러운 역설 속에서 누구 혹은 무엇이 인간을 구성하는지, 체제가 형성하는 ‘인간’으로서 존재 조건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이강승의 <표지들(퀴어락)>은 퀴어락의 아카이브 컬렉션을 중심으로, 지난 40년 동안 한국 퀴어 공동체의 다양한 역사를 탐색한다. 이 설치물은 주류 역사에서 소외되어 왔던 개인 서사를 기념하는 것이다.
올리비아 에르랭어의 <이다, 이다, 이다!>는 미술관 공간을 거의 장소가 아닌 장소, 대기와 시간 보내기에 바쳐진 장소인 세탁실로 만든다. 일종의 성별이 확립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상상 속의 존재인 인어의 꼬리로 가득 찬 세탁실은 이동성, 하이브리드화, 성별 전형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마지막으로 마틴 심스의 <몸짓에 대한 메모>는 비디오 설치를 통해 손짓, 몸짓, 실제 언어 등이 받는 문화적인 영향을 고찰하고 이를 통해 정체성의 확립이 허용된다는 사실을 살펴본다. 즉, 실제 언어는 만들어진 것을 암시하고 대안적인 정체성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