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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민의 파리지앵] 1. 매일 장보러 가는 파리 남자들의 한판승부

[FashionSeoul-파리 임성민 특파원] 저녁 7시~9시 사이 파리의 대형마트(까르푸, 카지노, 오샹)에는 장을 보는 사람들로 북적 인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남자들이 정말 많다는 거다. 학생으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젊은이, 퇴근 후 정장차림의 30~40대 중년층, 연세가 지긋이 들어 머리가 희끗 희끗한 어르신까지 장보기에 여념이 없다. 물건을 구입할 때도 얼마나 꼼꼼한지 이것저것 가격을 비교해가며 물건을 들었다 놨다 하기 일쑤다. 할인상품 선점을 위해 치열한 눈치작전도 벌어진다.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장보기달인들의 경연장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거 좀 이상하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어머니들이 장을 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파리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거의 비슷하거나 오히려 남자가 더 많을 때도 있다. 나 역시 파리에 캠프를 차리고 나서 대형슈퍼마켓을 1주일에 4~5번정도 찾을 정도로 단골이 됐다. 안타까운 건 마트를 갈 때마다 여인네들의 화사한 얼굴을 보기보다는 투박한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거다.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혹시 우리동네만 그런 줄 알고 옆 동네를 가봤는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도대체 그 이유가 뭔지 찾아 나섰다. 이 괴이한 현상을 풀기 위해서.

파리에서는 남자들도 매일 장을 본다. 사진=임성민
파리에서는 남자들도 매일 장을 본다. 사진=임성민

#난 혼자 하는 게 좋아

첫 번째는 파리의 넘치는 독신자 때문이다. 넘쳐나는 싱글족 때문에 프랑스를 ‘독신의 나라’, 파리를 ‘고독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국립경제연구소(Insee)의 ‘2013인구통계 연구결과’에 따르면, 파리의 전체가구 중 51%가 독신가구로 나타났다. 즉 한 집 건너 한 집이 혼자서 살림을 차리고 있다는 얘기다.

그럼 이 많은 독신가구는 도대체 왜 생기는 걸까? 주된 원인은 프랑스의 높은 이혼율에 있다. 프랑스국립경제연구소는 2011년 한해 프랑스의 이혼율이 무려 44.7%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커플 2쌍 중 1쌍은 살아보고 마음에 안들면 과감하게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또한 프랑스는 PACs(Pacte Civil de Solidarite : 시민연대 협약, 결혼과 동거의 중간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제도 도입으로 이혼율이 조금씩 줄고 있지만 지난 30년간 매년 12만 건의 이혼이 발생했었다. 결국 홀로서기에 나선 남자들 역시 장바구니를 들어야 하는 게 프랑스의 현실이다. 그래서 식료품 확보 전쟁은 그 무엇보다 치열하다.

# 밤일 안 하는 남자

프랑스에서는 밤일을 안 해도 살아 남을 수 있다. 밤일을 안하니 체력 떨어 질 일 없고 그러니 집안일에 충실해 질 수 밖에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의 법정 주당 근로 시간은 35시간이다. 법으로 정해놓은 근로 시간을 넘어 일을 하게 되면 회사는 직원에게 추가수당을 지급하거나 대체휴일제로 보상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야근을 시키면 그만큼 금전적 손실이 발생 하고 시위로 연결되기 때문에 ‘칼퇴문화’가 직장 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퇴근 후 회식도 없으니 오후 5~6시가 되면 하던 일을 과감히 덮고 집으로 돌아와 가정적인 남자가 된다. 나랑 같이 살고 있는 프랑스인 페페는 IT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오전 10시에 아주 느긋하게 출근해서 저녁 6시에 칼같이 퇴근한다. 그래서 페페에게 “야근 해봤냐”고 물어보니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며”해보긴 해봤는데 언제인지 잘 기억이 안난다”는 얄미운 대답만 돌아왔다.

이에 더해 최근에는 이런 문화에 쐐기를 박는 일이 발생했다. 프랑스근로자들은 IT기기의 보급 때문에 업무시간 외에도 일에 시달려야 한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이에 프랑스노동조합과 엔지니어/컨설팅연맹은 법정 근로 시간 외에 전화나 이메일로 근로자들에게 업무를 지시할 수 없도록 제도화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이 조합과 연맹에 해당되는 약 25만명만 새로운 혜택을 받는다.(참고로 해외 유력 언론 및 우리나라 몇몇 언론은 프랑스전체가 이 협정을 적용하는 것처럼 보도했는데 명백한 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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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7시간 근로를 고수하는 프랑스직장

반면 우리나라 직장에서는 오후 6시가 퇴근시간이라고 해도 자신 있게 문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은 드문 편이다. 일이 많으면 당연히 야근을 해야 하고, 일이 없다고 해도 ‘부장 혹은 팀장이 일분일초라도 빨리 사무실을 나가게 해달라’라는 주문을 외우며 상사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걸로 끝이면 다행이다. 어쩌다 정시에 퇴근하려고 하면 갑자기 회식이 잡히고, 친구들과 밤에 술잔도 부딪혀야 하며, 경쟁에 뒤쳐지지 않게 어학원까지 다녀야 하니 한국사회에서 남자가 주중에 장보기란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피곤한 한국남성들이여, 직장 생활 힘들어서 못하겠는가? 밤일 하기 싫은가? 그럼 프랑스로 오면 된다. 대신 장은 봐야 한다.

# 이제 남성상위는 그만

프랑스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 구분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남성은 가족부양, 여성은 현모양처’라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생각과는 확연히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인들. 물론 요즘 우리나라도 집안일 안 도와주는 남자는 배우자감으로 낙제점을 받고 있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좀 더 현장감 있는 얘기를 듣고 싶어 프랑스친구 마에바(여, 25세)에게 물어봤다.

“에바야(이름이 마에바인데 마를 빼고 에바라고 부른다). 프랑스에서는 남자들이 장을 보러 가던데. 왜 그런 거야?”

“그게 뭐 어때서? 당연한 거 아냐?”

“아니. 한국에서는 보통 여자들이 장을 보거든.”

“에이, 프랑스에서는 그런 거 없어”.

“그럼 만약에 나중에 결혼해서 남자가 집안일은 너보고 도맡아 하라 그러면 어떻게 할거야?”

“웃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래도 남자가 계속 집안일 안 도와주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럼 나도 안 하지. 내가 왜 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그리고 더 이상 노예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소리 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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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을 강조하는 프랑스사회

사실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다른 서양국가에 비해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을 늦게 받아들였다. 뉴질랜드가 1893년 세계최초로 여성참정권을 인정했고, 유럽에서는 핀란드가 1906년에 처음으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이어 미국 1920년, 영국 1928년, 프랑스는 이것보다 약 20년 후인 1948년에 여성에게 참정권을 건네줬다. 1948년에 여성참정권을 제정한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여성의 권리를 인정한 프랑스다. 작년에 폐지됐지만 ‘여성 바지 착용 금지법’이 약 213년 동안 존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지난 몇 십 년간 여권신장을 위해 학교에서 양성평등 교육을 실시하고 남녀임금평등법을 도입하는등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 올랑드정부가 들어선 2012년에는 34명의 장관 중 17명을 여성으로 구성 할 만큼 양성평등을 강조하고 있는 중이다. 점차 변해가고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남자가 해야 할 일과 여자가 해야 할 일의 경계는 사라지고 있다. 파리에서 장보기는 더 이상 여성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오늘도 나는 집 앞에 있는 카지노(대형마트)로 달려가 산전수전 다 겪은 장보기고수들과 한판 자웅을 겨뤄야 한다. 아직 그들과의 진검 승부를 하기에는 실력이 모자란 걸 안다. 월요일 식료품 질이 제일 안 좋다는 정보도 며칠 전에 입수했다. 젠장 여태껏 월요일은 빠지지 않고 갔었다. 이런 시련을 통해 내공을 쌓고 있는 중이다. 두고 봐라. 머지않아 장보기고수들을 제치고 가장 신선한 채소와 질 좋은 고기를 재빠르게 내 장바구니에 담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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