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Seoul-파리 임성민, 심상인 특파원]
“아 그래요. 업무 마치고 거기서 얘기하면 되겠어요.”
수화기 너머로 생각보다 따뜻한 톤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KBS글로벌성공시대>, <김수로 김민종의 마이퀸>에서 조명한 그녀의 모습은 차갑고 당찼었다. 세계적인 모델들도 그녀의 말 한마디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지레 ‘목소리도 차갑겠지’ 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약속 당일 파리 남쪽 14구 ‘Alésia’지하철역 옆에 자리잡은 ‘핀업스튜디오’로 향했다. 해외유명인들 및 각종 브랜드의 사진촬영 장소로 명성이 자자한 ‘핀업스튜디오’의 외관은 생각보다 수수했다. 겉에서 볼 때는 과연 여기가 팝스타 제이지, 육상단거리황제 우샤인볼트가 거쳐간 곳인지 살짝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평일 오후 3시였는데 주변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고 날씨까지 우중충해 삭막한 느낌까지 들었다.
어쨌든 건물로 들어가 안내원에게 “박윤정디자이너랑 인터뷰가 있는데요”라고 얘기했더니 “지금 작업 끝나고 식사 중인 것 같은데 안에서 잠깐만 기다리세요”라는 응답이 돌아왔다.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니 저 멀리 건너편에 박디자이너 포함 8명 정도의 남녀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혹시 유명배우가 있을까 봐 흘깃흘깃 그 쪽 테이블로 눈을 돌렸다. 아는 사람이라도 보게 되면 ‘사진 한번만 찍으시죠’라는 대사까지 마음속으로 준비해 뒀었다.
10분 정도 레스토랑벽에 걸려있는 외국영화배우들의 사진을 감상하고 있는데 박디자이너가 천천히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일 끝나고 식사 중 이었어요.” 직접들은 그녀의 음성 역시 냉정함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어 그런데 그 가방 예쁘네요”라며 매의 눈으로 기자의 가방을 주시했다. 누가 디자이너 아니랄까봐. 역시 예리하다. 직업은 속일 수가 없나 보다.
박윤정씨는 프랑스 대표 남성복 브랜드인 ‘스말토’의 수석디자이너다. 헐리우드 스타배우인 숀 코넬리,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프랑스의 국민배우로 불렸던 제라르 드파르디유 거기에다 프랑스축구대표팀까지 박디자이너의 손을 거친 옷을 입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ESMOD 파리를 졸업하고 인턴으로 스말토에 입사해 불과 7년 만에 수석디자이너가된 그녀. 그 당시 박윤정디자이너의 나이는 29살이었다.
“오늘은 그 동안 언론에서 다루지 않았던 내용을 중심으로 인터뷰하겠습니다.” <라디오스타>의 김구라처럼 강하게 물었다. 안 봐주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사실 박디자이너는 한국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워낙 유명한지라 각종 미디어에서 그녀를 집중적으로 다뤘었다. 이미 여러 번 그녀의 이야기가 소개됐기에 남들이 안 했던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고 싶었다.
“네. 그렇게 하세요.” 박디자이너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여유롭게 받아 쳤다. 그것도 엷은 미소를 띄우며 당당하게 나오니 오히려 질문한 내가 살짝 당황했다.
좋습니다. 단 7년 만에 그것도 20대에 그 자리까지 오른 건 재능입니까? 노력입니까? 예체능계에는 재능을 타고난 완성형 천재가 많기 때문에 이 질문을 던졌다.
“(잠시 고민하며)재능과 노력 거의 반반 인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미술에 어느 정도 소질이 있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노력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저는 어떤 일을 맡으면 그냥 그것만 하지 않고 그 다음 일까지 생각하면서 다해버리는 스타일이에요. 보통 프랑스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는데 저는 성격상 그게 안되더라고요. 전에 같이 작업을 했던 선임자가 일을 엄청 많이 시켰어요. 물론 힘들었지만 그분도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저를 시험 했던 거죠. 한번 일을 시작하면 중간에 절대 포기 라는 건 없습니다. 끝을 봐야 해요. 제가 좀 그래요(웃음).”
그러니 일시키는 사람 입장에서는 좋아 할 수 밖에 없겠군요. 그런데 보통 팀으로 일을 하는데 팀원들이 싫어하지 않나요? 왜 쓸데없이 남의 일까지 우리가 하나 라는 불평이 있을 것 같은데요.
“다행히도 저희 팀은 그런 불만이 없었어요. 팀이 소규모여서 그런지 정말 가족 같은 분위기였거든요. 그래서 모두 다 열심히 했습니다. 자기 일만 하는 사람은 팀에서 살아 남을 수 없어요. 그런 모습을 보이면 바로 ‘퇴출’이에요(강하게). 참고로 저희 팀의 실장이 한국 사람인데 처음 일을 시켰을 때 어찌나 일을 똑 부러지게 하던지 마음에 쏙 들었어요. 저처럼 이것저것 다 챙기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처음에 저랑 일하면 좀 힘든데 그것만 지나면 실력도 금방 늘고 일도 쉬워집니다(웃음).”
이 부분에서 박디자이너는 ‘초반에는 힘들다는 걸’ 강하게 설명했다. 그 순간 새끼를 벼랑으로 떨어뜨려 살아남는 녀석만 키운다는 백수의 왕 사자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스말토에서 박디자이너는 바로 어미사자였다. 이 과정을 거친 직원들이야말로 어떤 무대에서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라는 걸 그녀는 강조하는 듯해 보였다.
서울에서 점 보신적이 있으시죠?
“하하하 아버지랑 딱 한번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운이 정말 좋아서 앞으로도 앞길이 탄탄대로라고 나왔다면서요? 그럼 지금의 박윤정이 되기까지 운은 얼마나 작용했습니까?
“(한치도 망설임 없이)운이 정말 좋았죠. 인턴으로 입사해서 7년 만에 수석디자이너가 됐으니까요. 그것도 제가 만 29살 때죠. 물론 운만 좋아서 제가 빠르게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 온 건 아니지만 결정적 인 건 운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 될 당시 이전 수석디자이너가 퇴사를 했거든요. 타이밍이 정말 기가 막히게 맞았던 거죠(웃음).”
역시 인생은 ‘운빨’,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한국말도 잘하고 각종 외국어에 능통하시죠. 몇 개국어 합니까?
“총 5개국어를 해요.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태리어(웃음).”
박윤정디자이너를 만나기 전 그녀를 조명한 ‘KBS글로벌성공시대’를 프랑스 친구와 같이 봤다. 박디자이너가 스말토 직원들과 불어로 얘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친구가 깜짝 놀라더니 “저 사람 진짜 한국인이야? 불어 완벽한데”라며 감탄을 했다. 이에 더해 그녀는 스위스의 독어권에서 태어나서 독어 역시 유창하고, 이태리에 있는 스말토공장에서는 이태리어로 업무를 본다. 게다가 세계 공통어인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인터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로 했다. 아 이럴 때 신은 참 불공평하다.
남들은 외국어 하나도 하기 힘든 판국에 5개라니요. 그거 반칙입니다. 뭐가 제일 편합니까?
“대학교 때부터 계속 프랑스에 있어서 지금은 불어가 제일 편해요. 스위스는 교육시스템이 참 잘돼있어요. 그래서 학창시절에 다양한 언어를 배울 수 있었어요. 사실 언어를 잘해서 직장생활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죠.”
그럼 왜 스말토였나요?
“대학교에서 제 전공이 남성복이었고 파리에서는 스말토가 정말 유명한 브랜드잖아요. 졸업 후 일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스말토에 인턴자리가 난 거에요. 그래서 바로 지원했고 지금까지 일하고 있네요. 아 그리고 스말토에서 모델 했던 제 친구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친구들도 스말토를 적극 추천했었어요.”
패션철학을 한번 들어보죠.
옷을 입는 사람의 입장에서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거죠. 간혹 자신의 스타일만 고집하는 디자이너들은 너무 예술성이 강한 옷을 만들어요. 그런데 전 구매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의상 디자인부터, 제작, 판매까지 모든 걸 머릿속에 그리고 일을 시작해요. 이 모든 걸 제가 직접 관여하고 있어요. 예를 한번 들어보죠.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하고 공장에서 하는 제작과정을 모르면 옷이 자신의 의도한대로 나오지 않았을 때 문제점을 모르게 됩니다. 저는 공장에 자주 가서 옷이 어떤 제조과정을 거치는지 꼼꼼히 살펴보고 문제점을 발견하면 즉시 수정해요. 그렇잖아요. 아무리 디자인을 잘해도 옷이 엉망으로 나오면 결국 판매도 안 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다 아는 게 정말 중요한 거죠.”
마치 패션디자인계의 ‘스티브잡스’ 같은데요. 잡스는 애플의 모든 제품 디자인, 홍보, 판매까지 직접 진두지휘를 했다고 합니다.
“아….네. 고맙습니다(굉장히 수줍어하며).”
분위기좀 바꿔 볼 까요. 학창시절에 공부 안하고 2년 동안 좀 노셨죠?
“하하하. 네. 저는 너무 공부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생각해보세요. 학교공부랑 직장에서 하는 일이랑은 완전 다르거든요. 그런데 공부만 한 사람은 시야가 너무 좁아요. 폭넓은 생각을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해요. 물론 노는 걸 통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가 있죠.”
그럼 뭐하고 놉니까?
“저 노는거 좋아해요(웃으면서 강조). 주로 친구들이랑 여행을 많이 가요. 시간 날 때마다 특별한 장소나 나라와 관계없이 자주 가는 편이에요. 여행하면서 새로운 걸 보고, 듣고, 느끼면서 디자인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고 할 까요.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클럽도 자주 갔었는데 요즘은 덜 가는 편이에요(웃음).”
놀았던 경험이 지금의 박윤정디자이너를 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것 같은데요?
“맞아요. 놀면서 인맥도 쌓고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됐죠.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전 공부만 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디자이너 안됐다면 뭘 했을 것 같나요?
“호텔리어, 요리사, 인테리어디자이너, 사진작가. 참 다양하죠. 제가 여기저기에 관심이 많아요.”
방금 언급한 직업을 보니 대부분이 예술적인 능력이 필요하네요. 역시 그쪽에 끼가 있었나 봅니다.
“그런 것 같아요. 사실 부모님께서는 의사나 법조인이 되길 바라셨어요. 그런데 제 적성하고는 맞질 않았어요.”
스위스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스위스, 대학교는 파리, 그 이후 직장 역시 파리인데요. 한국은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한국 정말 좋아해요. 참고로 제 국적은 스위스인데 주변에서 제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봐요. 그러면 1초도 망설임 없이 무조건 한국 사람이라고 말해요. 일년에 한번은 무조건 한국에 가야 해요. 지난 몇 년간 파리에서 K-pop이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제가 한국드라마 왕 팬이거든요. 한국인기드라마는 거의 다 챙겨보고 있어요. 혹시 김희선씨 나오는 드라마 보셨나요? 그거 정말 재미있어요. 그 드라마 꼭 보세요(마치 해당방송사 관계자 인 것처럼).”
마치 한국문화 홍보대사 갔습니다.
“맞아요. 제 주변사람들에게 한국문화를 얼마나 많이 홍보하는데요(웃음).”
일해야지. 한국드라마 봐야지. 거기에다 놀기까지 해야 하니 정신 없이 바쁠 것 같습니다.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보약이라도 챙겨 먹나요?
“체력은 좀 타고 난 것 같아요. 그래도 일단 잘 먹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일주일에 3~4회 정도 헬스장에서 가서 1시간~1시간 30분 정도 운동을 하죠. 그런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그것도 좀 힘드네요(웃음). 아 그리고 보약은 안 먹어요. 그거 맛 없잖아요(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한국패션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면 좀 더 경쟁력이 있을까요?
“한국사람들 능력 뛰어난 건 다 아는 사실이죠. 특히 손재주는 탁월하잖아요. 좋은 아이디어도 많고요. 하지만 아직까지 세계무대에서는 실력만큼 빛을 발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왜 그렇죠?
“독창성이죠. 너무 유행에 휩쓸려 남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아요. 이제는 그러지 않았으면 해요. 물론 이건 우리나라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요. 전쟁 후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새로운 걸 창조했겠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우리나라가 전쟁상처를 완전히 극복하고 세계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잖아요. 지금부터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 때가 된 거죠.”
마지막으로 디자이너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디자이너는 공부를 특출 나게 잘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교를 나와야 성공하잖아요. 그런데 디자이너는 뛰어난 두뇌, 타고난 재능 이런 것보다 노력이 더 중요해요. 이거다 싶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 그러니 공부를 못한다거나 재능이 없다라는 걸 핑계대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 도전해보세요. 반드시 인정 받는 날이 올 거에요.”
확신합니까? 정말이죠?
“네. 확신합니다(자신있게).”
박디자이너를 역할모델로 삼으려는 후배들이 힘을 얻을 수 있겠네요. 좋습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려는 순간 박윤정디자이너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전 나중에 꼭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하나 있어요.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건데요. 전 세계 가난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공부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단지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것뿐 이잖아요. 또 부모들은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제가 받았던 많은 것들을 그 아이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요.”
생각지도 않은 얘기였다. 어렸을 때부터 승승장구했던 박디자이너.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기보다는 앞만 보고 직진만 한 것 같았던 그녀가 사회에 재능기부를 하겠다는 거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성공한 디자이너의 뻔한 스토리가 여기서 달라졌다. 아니 이제부터가 진짜 진행형이었다. 그 멋진 생각에 응원을 해주고 싶었고 동시에 확답도 받고 싶었다. “정말 좋은 얘깁니다. 제가 진짜로 하는지 안 하는지 지켜 볼 겁니다.”
“두고 보세요. 제가 꼭 하고 말 겁니다.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지만요.”
박디자이너는 인터뷰 중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자신의 꿈을 말하고 있었다. 공식인터뷰가 끝나고 박디자이너는 “이번주는 집에 가서 아버지 밥해드려야 해요”라며 해맑게 웃는 모습으로 자리를 떠났다. 일할 때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온데간데 없고 천상 우리나라 막내딸 모습이었다.
지금의 위치에 오른걸 감사하게 여기며 전 세계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박디자이너의 꿈이 꼭 이뤄지길 마음속으로 응원한다.
글_임성민 기자, 심상인 인턴 | 사진_임성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