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파리에 살던 시절 하우스메이트 페페라는 녀석이 있었다. 흑갈색 긴 곱슬머리를 한 페페는 와인을 마실 때 항상 달콤한 향의 물 담배를 빨며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에 예찬을 늘어놓던 전형적인 프랑스인이었다.
그런데 특이했던 점은 거의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같은 옷을 입었는지 몰랐다. 한 3주쯤 지났을까. 그때부터 페페가 남색 재킷에 검은 양복바지 그리고 검은 구두를 착용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여자도 아닌데 지가 뭘 입든 내가 무슨 상관이랴.
아무거나 입어도 괜찮은 남자
가만히 생각해보니 드레스코드가 꽤 엄격했던 예전 직장에서는 거의 매일 정장을 입고 출근했었다. 그때는 옷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장 무난한 남색 정장 한 벌, 회색 정장 한 벌에 안에 셔츠만 바꿔 입으면 꽤 괜찮은 출근 유니폼이 됐기 때문이다. 같은 옷을 입고 가도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 했다. 설사 알았다 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특히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 별로 개의치 않는 서양문화에서는 이런 현상을 좀 더 자주 볼 수 있다.
“난관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건가요?”, “당신을 소재로 한 영화 는 얼마나 현실과 일치하죠?” 강연에서 마크 주커버그에게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주커버그는 하나하나씩 질문에 대답해 나갔다.
“당신은 왜 매일 똑같은 티셔츠를 입죠? 혹시 똑같은 옷 한 벌을 계속 입는 건가요?” 자리에 모인 청중을 빵 터지게 만든 질문이 날아왔다.
주커버그가 웃으면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전 최대한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어떤 일을 결정하는데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죠.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또 있다.
“저는 회색 혹은 푸른 계통의 정장만 고수합니다. 어떤 결정을 하는데 있어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고 싶기 때문이죠. 그래서 무엇을 먹을지 어떤 옷을 입을지 이런 사소한 것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요. 그것 말고도 내려야 할 중요한 결정이 산더미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2012년배니티 페어(Vanity Fair)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이런 저명인사들이야 시간이 없어서 그렇다 치자. 하지만 남자들은 이런 거창한 이유를 들지 않아다 된다. 귀찮아서 같은 옷 입고, 술 마시고 늦게 일어나서 또 입고, 어제 깨끗하게 입었으니까 오늘 다시 입고 등의 이유로 이틀 연속 같은 옷을 입는데 큰 거부감은 없다. 참고로 아래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여자의 글인데 남자들의 실상을 알 수 있다.
정여사 이야기
과연 여성들은 어떨까? 지금 고개를 돌려 같은 옷을 이틀 연속으로 입고 나온 여성을 찾아보자. 있나? 뭐 혹시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좀 더 객관적인 목소리를 듣기 위해 결혼 전 뭇 남성들의 열렬한 구애를 받았던 내 절친 정여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너 회사 출근할 때 같은 옷 이틀 연속으로 입어 본적 있냐?”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아 있어 없어?”
“너 이상하다. 아마도 없는 것 같은데.”
“에이 그러지 말고 솔직히 얘기해봐. 내숭 떨지 말고.”
“야 없다고. 얘가 왜 이래. 내가 이런 거에 거짓말하는 거 봤니?”
“오케이. 믿어줄게. 그런데 이유는?”
“글쎄. 아마도 사회의 불편한 시선 때문이지. 그러니까 만약에 어제 입었던 옷을 오늘 또 입고 회사에 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뭐라고 생각하는데?” 난 그녀가 뭘 말하는 줄 얼핏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며 다시 물었다.
“이 바보. 만약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얘 어제 집에 안 들어갔구나. 술 먹고 남자랑 같이 잤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어?”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난 그런 불편한 시선이 싫어서 설사 집에 안 들어갔다 해도 아침 일찍 일어나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갔지.”
“오. 역시 정여사 다운데. 그대는 완전범죄의 대가야. 하하하.”
“완전범죄는 무슨. 그리고 밖에서 잠을 안 잤다고 해도 같은 옷은 입기 싫어.”
“왜? 말해봐?”
“사람들이 보면 ‘재는 돈이 없어서 매일 같은 옷을 입나? 자신한테 별로 신경을 안 쓰는구나’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우리나라에서는 남의 시선을 무시할 수가 없어.
“또 다른 이유 있어?”
“아 몰라. 그냥 똑같은 옷 입는 거 싫어.”
“오케이. 어쨌든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시선의 불편함이라는 거지?”
“응. 그래. 그런데 꼭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같은 옷을 안 입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겠지.”
“맞아. 내가 아는 동생한테도 물어봤는데 같은 옷을 연속으로 입어 본 적은 없대. 이유는 좀 더러워 보인대나.”
“뭐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데 우리나라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남의 시선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어쨌든 나는 그래.”
미국에서도 여자는 안되고
아직 여성을 향한 사회적 편견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존재한다.
미국 연방준비은행 회장인 자넷 옐런이 같은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롤콜의 칼럼니스트 워렌 로하스는 그녀가 같은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또 나왔다며 비난하는 글을 올려 미국 사회의 논쟁이 되기도 했었다.
내 친구 중 미국인 와이프를 둔 녀석이 있다. 그녀에게 이 글을 읽어보라고 보여줬더니 “남자가 똑같은 옷 입으면 아무 상관없고, 여자가 그러면 비난하는 건 뭐야. 미국같이 남녀평등을 외치는 사회에서 이거 완전 성차별이잖아”라며 핏대를 올렸다.
뭐 꼭 다 이런 경우만 있는 건 아니다. 뉴욕의 한 광고 회사에서 미술감독으로 근무 중인 마틸다 칼은 3년간 같은 옷을 입고 출근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3년 전 바쁜 월요일이었어요. 뭐 월요일은 누구한테나 바쁘죠. 마침 그날 아침에 정말 중요한 미팅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하다 이것저것 다 꺼내서 입어봤죠. 입으면서도 ‘이 치마는 너무 짧지 않나’. ‘이 옷은 너무 격식을 차린 건 아닐까’. 그렇게 고민하다 아무거나 옷을 골라 입었고 부랴부랴 지하철로 뛰었죠. 결국 미팅에 늦어서 짜증이 확 났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남자들은 회사에 아무 옷이나 입고 와도 언제나 편안해 보인다는 거죠. 그래서 저도 옷 고르는데 시간 낭비하지 않기로 결정했답니다.”
그래서 마틸다는 그녀만을 위한 유니폼을 마련했다. 하얀색 블라우스 15개, 검정 바지 6벌. 이 2가지 옷을 돌려 입는 방법으로 지난 3년간 아침에 무슨 옷을 입을지에 대한 걱정은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마틸다 같은 고민이 있는 여성들은 그녀처럼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오히려 자신만의 브랜딩을 형성하는데 더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스티브 잡스처럼 말이다.